영국 AI 로펌의 첫 승소가 한국 법조계에 던지는 질문
작성자최고관리자
작성일2026-07-28
조회수 71
본문
명도전문신문 “명도119” │ 기획기사
이재석 기자
“AI가 벽을 허물다”
빙엄의 ‘사법접근성’,
코크의 ‘법의 완성’,
그리고 한 프리랜서의 서사
“AI가 일반인과 사법제도 사이의 벽을 없앴습니다!”
타퀴디르(Tamires Camal Taquidir)는 자신의 경험을 이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런던에서 일하는 HR 분야 프리랜서다. 변호사 없이 소송을 시작해, 변호사 둘을 선임한 상대를 이겼다. 조력자는 AI 로펌 ‘가필드 AI(Garfield AI)’였다. 지난 5월 14일 완즈워스(Wandsworth) 카운티 법원의 전부승소 판결. AI 로펌의 도움으로 정식 재판에서 승소한 세계 첫 사례다.
그녀가 지불한 비용은 약 400파운드, 우리 돈 80만 원 남짓. 회수한 채권은 7,000파운드, 약 1,400만 원이었다.
영국의 톰 빙엄(Tom Bingham)은 21세기 법치의 조건으로 사법접근성(Access to Justice)을 꼽았다. 400년 전 영국의 에드워드 코크(Edward Coke)는 ‘집행은 법의 완성이자 법의 열매(Executio est Finis et Fructus Legis)’라고 썼다. 두 법률가의 통찰과 AI 시대를 사는 한 일반인의 증언이 우리 법률시장에 화두를 던진다. 명도집행을 자문해 온 기자에게도 마찬가지다.
AI는 어디까지 했고, 인간은 무엇을 했나?
사건 자체는 평범한 소액 채권 분쟁이다. 타퀴디르는 관광숙박업체에 구두계약으로 용역을 제공하고 대금 7,000파운드를 받지 못했다. 1년을 기다린 끝에 그녀가 택한 것은 시간당 300파운드짜리 변호사 자문이 아니었다. 2025년 5월 영국 사무변호사(Solicitor) 규제기관 SRA로부터 세계 최초로 인가받은 AI 로펌, 가필드 AI였다.
주목할 지점은 역할 분담이다. 가필드 AI는 소송 전 최종통지서(Letter Before Action), 소장과 청구원인, 반소에 대한 반박서면, 증인진술서 4건, 재판기록(trial bundle)까지 처리했다. 법정 문 앞까지의 서면 업무 일체다.
법정에 선 것은 인간이었다. 타퀴디르는 재판 직전 800파운드, 우리 돈 160만 원을 들여 법정변호사(Barrister)를 선임했다. 3시간의 심리와 다수 증인에 대한 반대신문 끝에 7,000파운드 전액을 인용하는 판결을 받았다.
벽이 사라지다
7월 10일 한국 법률신문과의 화상 인터뷰에서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 사건의 본질이 사법접근성임을 보여준다(2026. 7. 16. 법률신문 1면 참조). 아는 사무변호사가 없었다. 시간과 비용이 얼마나 들지 가늠할 수 없었다.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조차 불확실한 상황에서 시간당 300파운드는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가필드 AI는 오아시스였다.
인상적인 대목은 AI가 인간 변호사처럼 먼저 물었다는 점이다. 계약이나 합의가 있었는지, 상대로부터 이미 받은 돈이 있는지. 사건이 성립할 수 있는지 검토한 뒤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단계별로 안내했다.
세계 최초가 된 기분을 묻자 그녀는 답했다. AI가 일반인과 사법제도 사이의 벽을 허물 수 있다는 것, 누구나 적은 비용으로 사법제도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 싶다고. 정의의 실현이 돈 때문에 좌절되어서는 안 되며, 기술로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빙엄의 저울 — 사법접근성은 법치의 구성요소다
영국 사법부 수장(Senior Law Lord)을 지낸 톰 빙엄은 만년의 저서 『법의 지배(The Rule of Law, 2010)』에서 법치를 구성하는 여덟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그중 하나가 분쟁 해결 수단에 대한 접근이다. 국가는 정당한 민사분쟁을 당사자가 감당할 수 있는 비용으로 지나친 지연 없이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 사법접근성은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법치 그 자체의 구성요소라는 뜻이다. 권리가 있어도 그것을 주장하고 실현할 통로가 막혀 있다면, 그 사회의 법의 지배는 그만큼 불완전하다.
7,000파운드의 채권은 시간당 300파운드의 자문료 앞에서 ‘소송할 가치가 없는 권리’가 된다. 사무변호사 선임 시 예상 비용 3,000파운드는 청구액의 절반에 육박한다. SRA가 가필드 AI를 인가하며 공익적 효과를 내세운 것은 빙엄의 저울 위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무조건적 허용은 아니었다. 환각의 고위험 영역인 판례 제시 기능은 시스템적으로 차단했다. AI는 의뢰인이 승인한 단계까지만 업무를 수행한다. 산출물의 최종 책임은 등록된 사무변호사에게 귀속되고, 배상책임보험 가입이 요구된다. 안전장치를 조건으로 문을 여는 것, 영국식 ‘규제 내 혁신’의 설계도다.
한국의 대답은 아직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대한변호사협회는 2024년 11월 AI 법률상담 서비스 ‘AI 대륙아주’를 출시한 법무법인 대륙아주에 법인 과태료 1,000만 원 등의 징계를 결정했다. 대륙아주가 2025년 1월 법무부에 낸 이의신청에 대한 판단은 2026년 7월 현재까지 나오지 않았다. 영국이 ‘어떤 조건이면 허용할 수 있는가’를 설계하는 동안, 한국은 ‘기존 규정 어디에 저촉되는가’를 심사해 왔다.
소비자 보호와 직역 질서라는 명분에는 나름의 논리가 있다. 그러나 보호가 입구를 막고 있다면, 그것이 누구를 위한 보호인지 물어야 한다.
코크의 경구 — 집행은 법의 완성이자 법의 열매다
Executio est Finis et Fructus Legis
집행은 법의 완성이자 법의 열매다.
— Sir Edward Coke, Coke on Littleton
타퀴디르의 이야기는 판결로 끝나지 않는다. 400년 전 영국 보통법의 초석을 놓은 대법관 코크는, 집행으로 비로소 법과 법치가 완성되고 정의와 권리가 구현된다고 보았다. 아무리 정교한 법도, 아무리 정당한 판결도, 집행되지 않으면 종이 위의 문장에 불과하다. 그녀가 손에 쥔 것도 아직은 ‘7,000파운드를 지급하라’는 판결문이다. 임의이행이 없다면 압류와 추심, 강제집행이 남는다.
빙엄의 사법접근성이 정의의 입구라면, 코크의 집행은 정의의 완성이다. 입구만 넓히고 출구의 정체를 방치하면, 법치는 절반만 작동한다.
대한민국 명도집행의 현실 —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출구는 어떠한가? 명도집행의 현실은 이렇다.
점유자의 알박기와 버티기, 법과 제도의 허점을 악용한 방해로 집행불능과 집행지연이 다반사다. 법과 정의가 불법과 불의에 굴복하고, 권리자가 터무니없는 인내와 희생을 강요당하는 장면이 현장 곳곳에서 반복된다.
판결까지 받은 권리자가 왜 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하는가? 불법 점유자에게 왜 사정을 해야 하고, 왜 거금을 건네야 하는가?
기술로 변호사 비용의 장벽을 넘게 하면 사법접근성은 높아지고 정의의 입구는 넓어진다. 그러나 한국의 권리자에게는 출구를 넓히는 일이 그에 못지않게 절실하다. 소송을 제기해 승소판결을 받는 것보다, 그 판결을 집행해 권리를 실현하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드는 경우가 적지 않다. 부동산 명도집행과 철거집행에서 특히 그렇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Justice delayed is justice denied).”
집행 지연은 정의의 가치를 반감시킨다. 사법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나아가 법치주의를 무너뜨린다. 더는 방치할 수 없다.
AI 시대의 민사집행 실무는?
가필드 AI가 대체한 업무의 성격을 다시 보자. 독촉장 발송, 소송 전 통지, 소장 작성, 답변서 분석과 반박. 절차가 정형화돼 있고, 서면 중심이며, 반복적이다. 한국에서는 지급명령 신청, 소액사건 소장 작성, 나아가 강제집행 신청과 배당요구, 인도명령 신청에 이르는 집행 절차의 문서 업무가 이에 해당한다. AI가 가장 먼저, 가장 잘할 분야가 바로 여기다.
위기인가. 절반만 맞다. 이 판결이 동시에 증명한 것은, 정형 업무의 자동화가 진행될수록 비정형 영역의 가치가 오히려 도드라진다는 사실이다. 서면은 AI가 썼지만, 법정에서 증인의 진술을 검증한 것은 인간이었다.
코크가 강조한 집행 단계로 가면 비정형성은 극대화된다. 점유관계의 확인, 유치권 주장의 진위 판별, 알박기와 조직적 저항에 대한 대응, 집행관·채권자·점유자 사이의 조율. 서류가 아니라 현장에서, 문서가 아니라 사람을 상대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AI가 아무리 서면을 잘 쓰게 되더라도, 이 영역은 인간의 몫으로 남는다.
이 판결이 던지는 질문
이 판결은 한국 법조계에 네 가지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첫째, 전문가의 직역이다. 변호사법과 법무사법이 그어 놓은 서류 작성 대행의 경계는 소비자가 유료 AI와 직접 대화하며 서면을 완성하는 시대에 어떤 방식으로 유지될 수 있는가?
둘째, 규제의 방향이다. 대륙아주 사건에 대한 법무부의 판단은 ‘한국형 SRA 모델’ — 안전장치를 조건으로 한 허용 — 의 출발점이 될 것인가, 아니면 진입 자체를 봉쇄하는 선례가 될 것인가?
셋째, 입법이다. 집행불능과 집행지연을 방치하는 법·제도의 허점을 언제까지 점유자의 무기가 되도록 방치할 것인가?.
넷째, 전문직 스스로의 문제다. AI가 정형 업무를 흡수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각 직역은 자신의 대체 불가능한 영역 — 코크의 표현을 빌리면 법을 완성시키는 일 — 을 증명할 수 있는가?
타퀴디르는 AI가 벽을 허물었다고 했다.
사법접근성이 정의의 문턱을 낮추는 일이라면, 집행은 그 문턱을 넘어 확인받은 권리가 결실을 맺게 하는 일이다.
벽이 사라진 자리에 문을 세우는 일 — 이 역시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명도전문신문 “명도119” │ 기획기사
이재석 기자
- PREV 다음 글이 없습니다.
- NEXT 유치권의 아킬레스건 File